1991년도의 그 청년에게
1991년 3월 말경의 LAX 공항 입국장소. 1991년 당시 한국에서 군대 제대한지 약 1년 정도 된 시간이었던 스물다섯의 나는 LAX 입국장에서 캐리어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한국에서는 공부를 못해 대학을 못 마친 상태로 미국에 왔고, 영어는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정도, 미국에 아는 사람은 당시 부모님과 형네 식구들, 이분들은 미리 미국에 와서 정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군화는 막 벗었는데, 새 인생을 시작할 운동화는 아직 신어 보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LAX 입국장에서 입국 심사관이 뭐라고 물었는데, 기억나는 말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어찌어찌해서 통과된 것 같다. 당시만 해도 미국 입국이 그렇게 힘든 시절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국에 온지 6년만에 간신히 졸업, 그리고 서른하나(당시는 한국 나이로 계산하는 추세였으니 그 당시 나이로는 33). 한국에서 못 마친 대학을 미국에서 마치는 데 6년이 걸렸다. 영어 강의를 들으며 단어장을 만들고, 새벽 청소 아르바이트와 식당 서빙 및 그로서리 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한국 학부생들 사이에서 내가 기억하기로는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대학원이나 박사 과정을 밟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1997년, 서른한 살. 텍사스 주정부 복지부서 MIS 파트에서 합격 통보 편지가 왔다. 첫 직장. 첫 명함. 출근후에 받은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영환 이라는 이름은 한국에 일단 묻어 두고, Yung Yi라는 이름이 새 명함과 함께 태어났다.
첫 출근 날 아침. 복도에서 누군가 지나가며 웃으면서 뭐라고 말했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냥 나 역시 웃었던 것 같다. 그러나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하게…
서른한 살의 나는 그날 모든것이 새로웠고 무엇보다 두려었다. 상사 이름은 Marsha Higginbottom이었다. 어느 회의 끝에 그녀가 말했다. “Just call me Marsha.” 나는 진지하게 답했다. “Yes, ma’am.”
한국에서는 상사 이름을 그냥 부르면 사회적 매장감이다. “김부장님”이라고 안 부르고 “영희야”라고 부르는 건 코미디 장면에서나 가끔 나오는 장면이었다. 게다가 나는 군대를 막 제대한 전형적인 한국 남자였다. 입에서는 자꾸 “Yes, ma’am.”이 나왔고, Marsha라는 이름은 매번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세 달쯤 지났을 때, 드디어 어느 회의에서 나는 입을 안열면 안될것 같아 무언가는 말한것 같다. 그러나 그 무언가가 차라리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았던 것이 문제였지만. 어째든 그날 영어 한 줄 말한것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더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Y2K, 그리고 사무실의 영웅들
1999년 가을부터 우리 부서는 비상이 결렸다. Y2K 버그. 텍사스 주정부의 복지 시스템 — 푸드 스탬프, 메디케이드, 차일드 서포트, 이 모든 게 COBOL과 도스 기반의 여러 프로그래밍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2000년 1월 1일 0시에 시스템이 멈출 수 있다는 공포가 사무실 아니 전세계를 덮쳤다.
나는 매일 야근했다. 한국식 성실함이 빛을 발한 시기였다. 동료들은 5시에 퇴근했지만, 나는 9시까지 남았다. 6개월 동안 코드를 한 줄씩 점검했다. 12월 31일 밤, 우리는 사무실에 모여 자정을 기다렸다. 12시가 지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Marsha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Yung, you saved Texas. Or at least our part of it.”
물론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처음으로, 한국이 아닌 곳에서, 영어가 아닌 일로,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는 기분을 느꼈다. 이민자가 진짜로 그 땅에 발을 디뎠다고 느끼는 순간은, 시민권 증서를 받는 날이 아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며 진심으로 고맙다고 하는 그 순간이다.
2003년, 늦은 결혼과 2005년의 퇴사
서른일곱(당시 한국 나이로 계산하면 서른아홉). 한국에서는 이미 노총각 소리 듣다 못해 친구들 결혼식에 참석조차 하지 못하는 나이였다. 미국에서는, 솔직히 미국에서도 늦은 편이었다. 동료들은 결혼 14년 차에 사춘기된 아이들도 있었다. 아내를 만났다. 간호사.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
2005년. 텍사스 주정부에서 8년. 안정된 월급, 좋은 혜택, 일찍 받는 연금. 미국 이민자가 꿈꾸는 모든 것이 그 책상 위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사표를 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흔이 되기 전에 한 번은 내 일을 해 보고 싶었다. 한국에서 공부 못 했던 청년이, 간신히 미국 대학을 졸업하고, 정부 직장에 8년 다닌 끝에, 마지막 한 번의 도전을 하고 싶었다. 휴스턴으로 옮겼다. 웹디자인 사업을 시작했다.
인터넷이 모든 비즈니스의 얼굴이 되어 가던 때였다. 아내가 한마디 했다. “그 좋은 직장 그만둘 정도면 뭔가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사업 자신있냐고?” 나는 대답했다. “도전 정신 하나면 되는거 아냐!” 순진하다 못해 바보같은 말이었다.
휴스턴에서의 21년
2005년부터 2026년 오늘까지, 휴스턴에서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어떤 때는 작은 식당의 메뉴 페이지, 어떤 때는 한인 교회 웹사이트, 어떤 때는 변호사 사무실, 어떤 때는 작은 비영리 단체. 누가 보면 그렇게 화려한 경력은 아니지만, 21년 동안 한 번도 끊기지 않은 일. 그게 내 자랑이다.
두 딸은 이제 대학생이다. 큰 딸이 가끔 묻는다. “Dad, weren’t you scared when you quit the state job?” 나는 솔직하게 답한다. “엄청 무서웠지. 근데 한국에서 미국 올 때와 첫 직장 출근할때 만큼은 아니더라.” 스물다섯의 LAX 입국장과 첫 출근날. 그 두 날에 비하면, 어떤 두려움도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35년의 시간이 가르쳐 준 것
- “영어가 아니라 OS를 바꿔라”이다. 영어 단어 천 개 외우는 것보다, 회의 석상에서 과감하게 한 마디 던지는게 훨씬 효과적이다. 미국에서 살아갈때 진짜 장벽은 영어 단어가 아니라 태도다. 한국에서 그대로 가져온 OS, 윗사람 앞에서 작아지기, 회의에서 일단 얌전하게 듣기, 점심도 안 먹고 일하기, 이건 미국 사무실에서 “존재감 없는 사람의 전형적인 매뉴얼”이다. OS를 다 갈아엎으라는 게 아니다. 듀얼 부팅을 배워야 한다는 거다.
- 한국식 성실함은 유지하되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미국 동료들이 결국 나를 인정한 건 sarcasm(일종의 농담이나 비유)을 배워서가 아니라 약속한 프로젝트 마감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아서였다. 부탁받지 않은 일까지 덤으로 처리해 주는 사람이라서였다. Y2K를 6개월 야근으로 막은 한국 남자라서였다. 한국에서 길러진 성실함은 여기에서도 그래로 먹힌다. 다만, 침묵 또는 겸손함으로 애써 포장하지 말고 “I’ll handle it” 한마디를 붙이는 자신감만 익히면 된다.
- 늦깎이는 늦은 게 아니다 스물다섯에 미국 정착. 서른한살에 첫 직장 입사. 서른일곱에 결혼. 서른아홉에 창업. 모든 게 남들보다 한 박자 늦었다. 처음엔 그게 콤플렉스였다. 그러나 35년이 지나고 보니 알게 됐다. 늦게 시작한 사람은, 빨리 시작한 사람이 못 보는 걸 본다. 한국과 미국, 두 사회의 일하는 방식을 다 겪은 사람만 할 수 있는 판단이 있다. 그게 결국 내 자산이 됐다.
1991년의 나에게
LAX 입국장에서 캐리어 하나 들고 서 있던 그 스물다섯의 청년에게, 만약 한 마디 해줄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환아, 미국 와서 6년이나 걸려 대학 졸업해도 괜찮다. 늦은 거 아니다. 서른하나에 첫 직장 잡아도 괜찮다. 정말 늦은 거 아니다. 영어 발음 이상하다고 부끄러워하지 마라. 생각과 태도만 바꾸면 용감해질 수 있다. 서른일곱에 결혼해도 괜찮다. 오히려 신중하게 만난 그 사람이 평생 네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인거다!”
마흔에 텍사스 주정부 직장 그만두고 휴스턴에 와서 인터넷사업을 하면서 후회한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날은 와이프도 한마디 거든다. “그러게 왜 그 좋은 직장 그만둬서 이렇게 고생하냐고!” 그런데 결국 나는 21년을 버텼다.
그리고 두 딸이 대학생이 된 어느 날, 나에게 “주 정부 그만둔 것 후회화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그날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Yeah. Yeah, I am. I have regrets—but I would have regretted it even more if I had kept working for the state government(후회하지, 그러나 주 정부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으면 더 후회했을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