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년 전 오늘(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의 중재로 조선이 일본에 넘어간 날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 주 포츠머스 인근 웬트워스-바이-더-씨(Wentworth-by-the-Sea) 호텔에서 러·일 양국이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에 서명했다. 러일전쟁(1904~1905)을 끝낸 이 조약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 아래 체결됐으며, 루스벨트는 이 공로로 이듬해인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대한제국)의 입장에서는 이 조약이 일본의 보호국화를 국제적으로 공인한 결정적 계기였고, 1910년 국권 피탈과 재미 한인 이민 역사의 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121년이 지난 지금도 의미 깊게 돌아봐야 할 역사다.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의 배경

19세기 말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다툼은 1904년 2월 일본의 러시아 기습 공격으로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일본은 뤼순(旅順) 전투와 쓰시마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하며 군사적 우위를 점했지만, 장기전에 따른 재정 고갈로 인해 강화를 원하고 있었다. 러시아 역시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사건 등 국내 혁명 위기로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의 태평양 이익 수호와 국제 중재자로서의 명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1905년 여름, 뉴햄프셔 포츠머스 해군 조선소에서 러·일 협상이 시작됐고, 40여 일간의 협상 끝에 9월 5일 조약이 체결됐다.
태프트-가쓰라 밀약: 조선을 거래한 미국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기 약 6주 전인 1905년 7월 27일,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와 일본 총리 가쓰라 타로(桂太郞) 사이에 비밀 각서가 교환됐다. 이 태프트-가쓰라 밀약(Taft-Katsura Memorandum)의 핵심은 간단했다.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묵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밀약은 1924년에야 공개됐고, 당시 조선 정부는 물론 미국 의회도 몰랐다. 미국과 조선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통해 우방 관계를 맺었으나, 실제로 미국은 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등을 돌린 셈이었다. 1882년 중국인 배제법이 시행되던 같은 해에 맺어진 이 조약의 역사적 아이러니는 오늘날에도 회자된다.
포츠머스 조약의 주요 내용과 조선에 대한 영향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우월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익”을 러시아가 인정하도록 명시했다. 이 조항은 사실상 조선에 대한 국제적 보호권을 일본에 부여한 것이었다. 불과 두 달 뒤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을사조약(乙巳條約, 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반도를 완전히 병합했다.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1905년, 조선에서 하와이로의 이민은 이미 2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1903년 1월 조선인 102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이 재미 한인 이민의 시작이었다. 일제강점기(1910~1945)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망명자, 독립운동가, 학생,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재미 한인 사회의 뿌리가 됐다.
루스벨트의 노벨 평화상, 다른 시각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조약 중재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인 최초의 노벨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관점에서 이 중재는 조선의 운명을 일본에 넘기는 데 기여한 행위였다. 루스벨트 자신도 “일본이 조선인들보다 조선을 더 잘 다스릴 것”이라는 당시 서구의 일반적인 제국주의적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조선 고종은 1905년 포츠머스 회의 진행 중에 루스벨트에게 특사를 파견해 미국의 도움을 구했으나, 루스벨트는 이를 거절했다. 헐버트(Homer Hulbert) 선교사가 조선 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워싱턴에 왔지만 국무부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05년 이후, 일제강점기와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포츠머스 조약 이후 미국에 있던 한인 이민자들은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이 됐다. 1905년 하와이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가 창설됐고, 1909년에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됐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재미 한인들은 미국 내 여론 형성과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V-J Day(대일전승기념일)를 맞이한 것도 미국의 참전 덕분이었다. 나가사키 원폭에는 수천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40년의 일제강점기를 끝낸 해방은 기쁨이었지만, 미·소의 분할 점령으로 한반도는 또다시 분단됐다. 1949년 창설된 미 국방부는 불과 1년 뒤 터진 한국전쟁에 대응해야 했다.
포츠머스 조약 유적지: 뉴햄프셔에서 만나는 역사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웬트워스-바이-더-씨 호텔은 현재도 뉴햄프셔 주 뉴캐슬 섬에 남아 있으며, 리조트 호텔로 운영 중이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은 이 조약의 역사적 의미를 기록하고 있으며, 포츠머스 해군 조선소(Portsmouth Naval Shipyard)는 현재도 가동 중인 미 해군 시설이다. 1916년 창설된 국립공원관리청이 보전하는 역사 유적 중 하나다.
미국 동부를 여행하는 한인이라면 뉴햄프셔 포츠머스를 방문해 이 역사의 현장을 직접 걸어볼 것을 권한다. 뉴잉글랜드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 포츠머스는 미국 독립혁명 시대 유산과 함께 19세기 해군 역사까지 품고 있다.
포츠머스 조약과 한인 이민의 연결고리
재미 한인 200만 시대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5년 이민국적법(하트-셀러법)이 나오고, 더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이민의 출발점인 1905년 포츠머스 조약에 닿는다. 오늘 9월 5일, 121년 전 뉴햄프셔의 한 호텔에서 체결된 조약이 어떻게 조선의 운명을 바꾸고, 수십 년 뒤 수백만 한인이 미국에 뿌리내리는 역사의 씨앗이 됐는지를 다시 한번 기억하는 날이다.
자주 묻는 질문 (FAQ)
- Q. 포츠머스 조약이 을사조약과 어떻게 다른가요?
- A.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은 러시아가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조약입니다. 을사조약(1905년 11월)은 일본이 조선 정부를 강압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한 조약으로, 조선을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이 국제적 승인을, 을사조약이 실질적 지배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 Q.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공식 조약인가요?
- A. 아닙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의회 비준을 거치지 않은 비공식 각서(memorandum)입니다.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한다는 정치적 신호를 국제 사회에 보낸 것으로 역사적으로 평가됩니다.
- Q.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조선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졌나요?
- A. 루스벨트는 당시 서구 지도자들의 일반적인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일본을 근대화된 강국으로 인정하면서도 조선을 자주적 국가로 보지 않았습니다. 조선 고종의 특사 요청을 거절한 것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 Q. 포츠머스 조약 이후 한인들은 어디로 이민했나요?
- A. 1905년 이후 일본이 하와이 이민을 금지하면서 공식 이민은 급감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망명자, 유학생, 사진신부 등 다양한 경로로 미주 이민이 이어졌습니다. 1924년 이민제한법으로 아시아계 이민이 사실상 금지됐다가, 1965년 이민국적법 이후 대규모 한인 이민이 본격화됐습니다.
참고 자료: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 미 국무부 역사국(Office of the Historian), 노벨위원회 공식 자료(Theodore Roosevelt, 1906 Nobel Peace Priz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