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과 조선인 강제징용, 81주년에 되돌아보는 잊혀진 희생자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으로 수천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자가 희생됐습니다. 일제 강제동원으로 미쓰비시 조선소에 배치된 그들의 이야기, 해방 후 보상에서 배제된 역사, 그리고 광복까지 6일간의 복잡한 역사를 정리합니다.
미국 국립핵과학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Nuclear Science and History), 원폭유산재단(Atomic Heritage Foundation), 일본 나가사키 원폭자료관(Nagasaki Atomic Bomb Museum) 공식 기록, 한국 행정안전부 원폭피해자 지원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피해자 수 등 일부 수치는 사료마다 소폭 차이가 있으며, 여기에 기재된 수치는 역사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추정치입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과 조선인 강제징용자, 81주년에 다시 읽는 잊혀진 희생자들
81년 전 오늘,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미군 B-29 폭격기 ‘복스카(Bockscar)‘에서 투하된 플루토늄 핵폭탄 ‘팻맨(Fat Man)‘이 일본 나가사키 상공 500m에서 폭발했습니다. 순간적인 폭풍과 열선, 방사선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중에는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나가사키 군수공장과 조선소에서 일하던 수천 명의 조선인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수십 년간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나가사키 원폭, 8월 9일의 기록

| 항목 | 기록 |
|---|---|
| 투하 일시 |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02분 |
| 폭탄 종류 | 플루토늄 내폭형 핵폭탄 ‘팻맨(Fat Man)’, 폭발력 21킬로톤 |
| 투하 고도 | 폭심지 상공 약 503m |
| 즉사자 | 약 40,000~80,000명 (원폭자료관 추정치; 연말까지 사망자 포함 시 70,000~140,000명) |
| 최초 목표 지점 | 원래 목표는 고쿠라(小倉)였으나 구름으로 인해 나가사키로 변경 |
| 조선인 사망 추정 | 나가사키 내 10,000~15,000명 (한국 정부 공식 집계 기준; 일부 연구에서는 더 높음) |
왜 그많은 조선인이 나가사키에 있었나? 강제징용의 역사
조선인들이 나가사키에 집중적으로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나가사키는 일제 군수 산업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일제의 강제동원(国民徴用令, 1939)
1939년 일본은 ‘국민징용령’을 발동해 식민지 조선인을 전시 노동력으로 강제 동원했습니다. 나가사키에는 일본 최대의 군함 건조사인 미쓰비시 조선소(三菱造船所)와 미쓰비시 병기공장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수천 명의 조선인 징용자들이 배치돼 군함 건조, 탄약 생산, 광산 채굴 등 극히 위험하고 가혹한 작업을 강요받았습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기록에 따르면, 원폭 투하 당시 나가사키에 체류 중이던 조선인은 약 10,000~12,000명으로 추산됩니다. 이 중 상당수가 미쓰비시 조선소와 병기공장 노동자였으며, 폭심지 인근에 위치한 이들 공장 특성상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생존자들은 해방 이후 귀국했지만, 일본 정부의 피폭자(히바쿠샤) 지원에서 수십 년간 배제됐습니다.
조선인 원폭 피해자가 겪은 이중의 고통
원폭 피해, 차별 없는 파괴
핵폭발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열선과 폭풍으로 현장에서 즉사한 이들, 방사선 피폭으로 서서히 병들어간 이들, 트라우마와 차별 속에 살아간 생존자들, 모두 같은 참화를 겪었습니다.
해방 후 귀국, 보상에서 배제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조선 해방 이후, 생존 조선인 징용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귀국 후 그들은 또 다른 차별에 직면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1957년 피폭자의료법을 제정해 히바쿠샤(피폭자) 수첩을 발급하고 의료 지원을 제공했지만, 일본을 떠난 외국인은 지원 대상에서 배제했습니다. 수십 년간 한인 피폭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의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일 교섭과 부분적 인정
1970년대부터 한인 피폭 생존자들의 권리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일본 법원은 1978년과 2003년 관련 판결을 통해 재한(在韓) 피폭자에 대한 지원 범위를 점진적으로 확대했습니다. 한국 정부도 2002년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 생존자와 2세에 대한 지원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나가사키 원폭과 조선 해방, 6일간의 역사
나가사키 원폭 투하(8월 9일) 이후,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만주·사할린 공격이 겹치면서 일본 군부 내에서 항복 논의가 급물살을 탔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은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조선인들에게 이 6일은, 나가사키 원폭(8월 9일)부터 광복(8월 15일)까지, 가장 참혹한 희생과 가장 감격스러운 해방이 동시에 찾아온 시간이었습니다.
한국과 원폭의 복잡한 역사: 원폭은 조선 독립을 앞당겼지만, 동시에 수천 명의 조선인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 역사는 단순한 ‘전쟁 종식’이 아니라, 식민지배·강제동원·핵폭발이 교차하는 복잡한 비극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을 기억하는 방식에서 조선인·한국인 피해자가 충분히 조명받지 못해 왔다는 점은 한일 역사 인식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기억과 추모
-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나가사키 시내 서쪽, 니시마쓰우라에 재일 한국인 단체가 세운 위령비가 있습니다. 매년 8월 9일 추모 행사가 열립니다
- 한국 원폭피해자협회: 현재까지도 2세·3세 피폭자들의 건강 지원과 역사 기록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재미 한인 역사와의 연결: 1945년 이전 미국 내 한인들은 하와이·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며 조국의 해방을 지원했습니다. 나가사키 원폭과 광복 소식은 그들에게도 복합적인 감정을 안겨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나가사키 원폭으로 사망한 조선인 수는 정확히 얼마인가요?
A. 정확한 수치는 지금도 논란이 있습니다. 한국 정부 공식 집계에서는 나가사키·히로시마 원폭 피해 조선인 사망자를 합쳐 4만~5만 명으로 추정하며, 이 중 나가사키 사망자는 1만~1만 5천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당시 조선인 노동자 명부가 불완전하고, 귀국 후 사망한 경우 집계가 어려워 실제 수치는 더 높을 수 있습니다.
Q. 한국이 원폭 투하를 어떻게 기억하는가요? 해방의 계기 vs. 희생?
A. 한국 사회에서 원폭은 매우 복잡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됩니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원폭은 해방의 계기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수만 명의 조선인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특히 강제징용 피해자 단체와 역사학자들은 “조선인 피해자도 원폭 피해자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 왔습니다. 한국에서 8월 9일은 공식 기념일은 아니지만, 8월 15일 광복절 전후로 관련 역사 교육과 추모 행사가 이루어집니다.
💬 나가사키 원폭과 한국인 피해자 역사, 알고 계셨나요
조선인 강제징용자가 나가사키 원폭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이전부터 알고 계셨나요? 가족 중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 경험이 있거나, 한국에서 관련 역사를 배우신 경험이 있다면 댓글로 나눠 주시면 이 역사를 더 풍부하게 기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미국의 한인 커뮤니티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을 어떤 시각으로 가르치고 기억하는지, 또는 미국의 역사 수업에서 조선인 피해자가 언급되는지에 대해서도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궁금한 점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답변드리겠습니다.
면책 고지: 이 글은 역사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한국 행정안전부 원폭피해자 지원 통계, 원폭유산재단 자료 등 공신력 있는 출처를 참고했습니다. 피해자 수 추정치는 출처마다 소폭 다를 수 있습니다.
